Saturday, April 22, 2006

조선시대 깡패집단 검계(劍契)

유교완전소중의 문치의 조선도 깡패집단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검계. 숙종부터 순조까지 약 120년간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무장을 하고 폭력과 강간 약탈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출신계층중 무반이나 중인이 많았고, 대부분 도성내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영조당시 검계를 소탕한 장붕익의 일대기를 보면.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무뢰배의 무리가 있었으니 이를 검계라 한다. 계는 우리나라에서 사람의 모임을 뜯하는 말이다. 검계의 사람들은 몸에 칼자국이 없으면 일우너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돌아다니며(앗사~ 주침야활이구려~) 맑은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비오는 날은 가죽신을 신는다.ㅂ 삿갓위에 구멍을 뜷어 깊이 눌러쓰고는 그 구멍으로 남을 내려본다. 혹은 스스로를 왈자라 부른다.

그종적이 도박장과 창기의 집에 두루 미친다. 쓰는 재물은 모두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것이며 양갓집 여자들이 이들에게 자주 겁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중 부유한 집의 자식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랬동안 제압하지 못했다. 장대장이 포도대장으로 있는 동안 검계의 무리를 대부분 잡아들여 발꿈치를 잘라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였다.

내용을 보면 검계의 무리는 부잣집 망나니 -_- 였소. 제도권안으로 편입되지 못해서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어찌보면 초딩스런 무리였소. 이들은 무예를 뽑내고 협기를 발휘했으며 범죄를 유희처럼 즐겼다고 하는데.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을 상징으로 여겼고 숙종떄는 공공연히 모여서 진법 연습까지 했다고 하오(이러니 토벌당하지 -_-)하지만 특정한 비전이나 개혁의식을 지닌 흔적은 없소. 그냥 부잣집 도련님 망나니 들이오.

단, 조선시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지던 검과 검술에 대해 애착을 보인거 같소. 이 검계들은 토벌한 장봉익조차 뛰어난 무예로 발탁된 자인데 그도 검계들은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하오.[한마디로 쌈 조낸 잘하는 녀석들이구려.]

일제의 조선식민통치의 방향- 동화주의


오늘은 동화정책의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저액에 대해 이야기 할떄, 일제의, 그것은 흔히 동화정책이라고 이야기하빈다.흔히 식민체제를 분류할때, 정치체제의 측면에서 식민지 의회가 있는가, 식민지 민이 본국에 대표를 파견하는가, 총독이 3권을 장악하는가. 의 , 크게 3가지로 나눔니다.


그리고 경제와 문화면에서 식민지 사회에대한 개입정도가 낮은가 높은가로 방임과 동화를 경정합니다.여기서 조선의 경우는 어떠냐? 기본적으로는 총독과-동화정책입니다만, 1920년 후에 조선총독의 권리-1920년전에는 조선내에서 3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 점체 제한되기 시작했고, 1932년이후에는 일본의 기족원에 한국의 대표가 적은수지만 파견돼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의원에도 대표가 파견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총독정치를 벗어날순 없습니다.


겯다리 수준. 엔블록 인구 6660만가운데 2000만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는 10%를 넘어간적이 없으니까요.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귀족원은 상원, 중의회은 하원이라 보시면 됩니다.)1895년에 대만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정부는 외국인 법률 고문에게 서유럽국가의 제국주의 경험을 자문합니다. 영국인고문은 영국의 정책-자치허용과 총독제를 - 이야기했고, 프랑스인고문은 완전동화를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정부는 검토끝에 식민지 동화정책을 택했다고 합니다.한번 성립된 동화정책은 이후 한국에도 적용됩니다. 니토베이나조나 요시노사구조같은 식민정책학자들은 일본의 관습과 제도를 한국에 이식하는 내지 연장주의는 불가하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차원에서, 일본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이에대해선 정치적 이유가 있는데 미우리 히로유기는 일본은 많은 희생으로 한국을 병합했고 그것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한반도가 국가권력이 수세일뗴는 방패의 역활을, 강세일떄는 창의 역활을 할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한마디로 앞마당 멀티란 소리..)그들은 일본의 상,민법 민사소송법과 민사주요법 대부분을 들여왔습니다, 단, 행위의 능력 친족 상속에 관한 규정은 제외했습니다. 일본의 형법과 형사소송법도 거의 그대로 적용했고요.전에도 말한적있는 교육제도는 말한적 있으니 패스하기로 했습니다.(초딩교육보급으로 어린애들 홀리는 시스템)동화정책을 최고로 하기위해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움직임을 탄압했습니다.

1910년에 설립된 한성상업회의소 191년의 조선산직장려계등 경제적 이유릐 단체까지 모두 해산되었고, 1920년 이후 조선물산장려회등의 몇몇 단체가 활동했지만, 만주사별이후 모두 해산됩니다.그리고 조선 총독부는 총독부의 명령이 관료기구를 통해 개개인에게 닿게 했습니다. 19030년 후반 인구1천명당 공무원의 숫자는 6.5명이 됩니다.(참고로 여기서 비교로 삶는 인도는 3명수준) 1935년 통계를 보면 일본인이 3만명정도, 한국인이 2만명정도 되고, 5급이상 관료중에는 일본인이 1202명, 한국인은 363명이 됩니다.

총독부의 힘이 모자라는 경우 교사 금융조합 농회직원들을 이용했습니다.


ps. 소햏이 일제시대의 경제,농업정책에 대해 이야기한것은 그들을 찬양한것이 아니오. 그리고 그들의 토지조사제가 농지개혁하고 관련있다는 소리는 씨알도 안했소. 내가 한말은 경작권 강화로 인해 소규모 자영농의 농업기술과 경영수완이 늘었고 이게 농지개혁을 낳았다는 말이오. 특히 내글에 눈불키고 달려느는 누 x x x 햏. 그들의 정책이 전체적으로 50년정도의 미국의 흑인정책과 유사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 먹고 살게는 해주는데 그 위로는 못하게 하는 그것말이오. 심심하다고 일빠라고하면 즐겁소?

일제치하의 한국의 교육제도와 영국치하의 인도의 교육제도.


인도 초등학교는 5년제를 원칙으로 했소.
교육과정에서는 어느나라나 모두 공통과목으로 넣는 읽기 쓰기 산수가 기본이고, 농촌학교에서는 농업을, 도시학교에서는 공예를 부과했소(말만 초등학교지 우리로치면 대략 실업계고등학교과정까지 5년안에 얕게 끝내버리는거 같소) 그밖에 보건 지리 체육 문법들을 선택과목으로 채택할수 있고, 읽기 쓰기 지리 역사는 모두 인도의 관한 것이었소.
초등학교의 학교수업은 당연히 인도어였고 영어교육은 4~5년 과정에서 비로서 이루어지었소.

인도정부(인도정부라는게 이상하지만 인도햏들은 식민지치하에서도 영국햏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소. 적어도 조선보단)한국은 수신, 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수과목을 필수로 했소.이과 창가 및 체조미술 수공 농업초보 상업초보등을 학교에서 채택할수 있게 조정하였소. 1921년의 2차조선교육령이후에는 일본역사가 추가되었소.

교육과정은 조선어 밑 한문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어였고, 식민지후기로 갈수록 조선어는 매장당해서 나중엔 방언중 하나라 취급해버리는 아햏햏한 일을 저질르오. 이러던 교육제도가 1차대전으로 완전히 둘의 차이가 더 벌어지오. 인도햏들은 지방분권형 자치를 획득함에 따라서 더욱 많은 인도인들이 행정-정치[식민지인도의 영연방이아니라.] 에 참여했소.

인도통치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대부분 인도인들 손에 넘어가요,.그에비에 한국은 완전히 뷁 되었소. 조선어가 주당 5시간 일본어가 10시간이던 것을 "조선인이라느 관념을 엷게하고 드디어는 자신이 단지 일본인이라는 관념에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조선어시간이 급감하게 되고 나중에는 3시간으로 떨어지다가 조선어가 선택과목으로 바뀌어버리오(단 선택이 개개인의 학생이 하는게 아니라 각각의 학교들이 하는것이기 떄문에 조선어의 선택은 극히 적었소.


그 일제헌병들 서슬 퍼러던 시절 누가 조선어를 선택하겟소? 사립정도나 가능하지 공립들은 사실상 불가 -_-)이것은 교육과 사상의 차이오. 인도정부[영국의] 는, 엘리트층에게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가르침으로서, 그들이 민중에게 그것을 주는 위로부터의 것을 생각했소. 그래서, 인도정부는 중, 고등학교도 중요하게 여겻고, 초등학교수가 3.3배 증가할동안 중등학교는 4배, 대학교는 5.5배 증가했소.그에비해 일본은 쬐끄만 어린것들 죄다 홀려버린다는 개념으로 교육관념을 잡은거 같소. 그래서 초등학교로의 취학은 한국이 일본에 비해 월등했지만 대학생비율이나 그런것은 현져히 떨어진다오.

구체적으로 한국의 취학률은 11년부터 41년까지 10년단위로 4.3 6.0 18.1 43.4 가 되오그에비해서 인도의 취학률은 11년부터 41년까지 10년단위로 11.1 13.3 17.9 19.8 이 되오참고로 영국은 인도먹은게 적어도 기백년은 넘으니 -_-;
그에디해 대학생비율은 , 인도 인구 1만명당 25.7명
한국 인구 1만명당 17.4명 (1941년) 이 되오.

아무래도 이러한 교육제도의 차이는 식민지 정책의 차이로 보인다는게 소햏의 생각이오.[중론이기도 하지만]영국정부는 인도를 그냥 포도따먹는 하나의 "섬멀티" 라고 생각한 반면, 일본은 한반도를 이른바 "내선일체" 니 어쩌니 해가지고, 자신의 "앞마당 기지" 로 만들려고 한거 같소. 실제로 일 의회같은데서 훗카이도나 오키나와처럼 조선도 가능하다~~ 라는 말을 많이 했던것으로 보이오.짤빵은 조선총독부 사진이오. 결코 그들을 찬양하는게 아니니 전륜성왕햏꼐선 좋게 보아주시구랴.2번쨰 짤빵은 대한제국시절 훈장들이오.